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비 발렌타인 (문단 편집) ===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 1기 === 해고된 뒤 1994년에는 뉴욕 메츠의 트리플 A 팀의 감독을 역임했다.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로 메이저리그 시즌 정상 개막이 불투명해진 1995년에는 [[일본프로야구]]의 [[치바 롯데 마린즈]]와 2년 계약을 맺고 감독직을 잡았다. 이 때 발렌타인과 함께 롯데에 입단한 선수로 레인저스 시절 발렌타인과 사제 관계였던 [[훌리오 프랑코]]가 있었다. 성적은 69승 58패 3무로 당시 리그 하위권 개막장팀이던 롯데를 순식간에 퍼시픽리그 2위로 올려놓는 기록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그는 당시 GM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 前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야구선수,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감독으로써 1978년 첫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줬고 그 뒤 [[세이부 라이온즈]]에 부임하여 1982년 라이온즈에게 24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과 이듬해에도 일본시리즈 우승 등을 안겨주는 등의 명활약을 펼친 감독이었다.]와 야구관에 있어 심각한 마찰을 겪었다. 일반적인 GM의 업무는 선수 팜을 관리하는 것(선수 영입, 방출, 트레이드, 드래프트와 같은 업무)이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그런 게 잡혀 있지 않았고 히로오카 본인도 감독으로 구르면서 주관이 대단히 강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히로오카는 발렌타인의 의향을 무시한 채 독단적인 자세를 취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히로오카는 발렌타인을 해임하고 수석 코치였던 에지리 아키라[* 히로오카의 [[와세다대학]] 동문이라 이와 관련된 말이 많았다. 공교롭게도 히로오카가 첫 성공을 거둔 야쿠르트 시절에도 코치진이 와세다대 출신 일색이라 와세다대 카르텔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를 추대한다. 이에 대해 발렌타인은 "GM이 선수 관리는 안하고 현장에 와서 참견이나 한다!"라고 디스했고, 히로오카는 "발렌타인은 현장에서 선수들을 열심히 가르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라고 맞대응하면서 발렌타인을 비판했다. 결국 사고관의 차이로 인해 생긴 씁쓸한 결말이었다. 아,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그리고 마린즈는 망했다]].'''[* 롯데는 발렌타인 감독이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A클래스(리그 1~3위)에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다. 1998년에는 '''18연패'''를 기록하며 '''일본프로야구 최다연패 기록'''을 세웠고, [[롯데 자이언츠|한국 롯데]]의 [[8888577]] 시절을 연상케하는 긴 암흑기를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